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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의 차 생활

부자 연아 아빠 2022. 3. 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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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의 차 생활

지금까지 차가 어떤 경로로 영국에 들어와 국민적인 음료로서 정착했고, 나아가 어떻게 영국 특유의 홍차 문화로 꽃 피웠는지 그 과정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차 생활 초창기에 영국 사람들이 남긴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차를 '중국맥주' 라고 부르다

초창기 영국의 커피 하우스에서는 마치 오늘날 생맥주를 통에서 따르듯이 차즙(茶汁)을 미리 우려내 작은 통에 담아 두었다가 손님이 와서 차를 주문하면 그 통에서 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차를 '중국맥주'라 부르기도 하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진귀한 옛날이야기가 아 닐 수 없다.

 

하기야 해방 직후 우리도 미군의 레이션 박스에 들어 있던 커피를 복통약이라고 믿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느 나라는 외국 문화를 처음 수용하는 과정에선 여러 가지 난센스를 남기는 게 일반적인 문화현상이 아닌가 싶다.

 

차즙은 버리고 잎을 버터에 발라먹다.

영국 가정에서의 음다법을 보면, 마치 우리가 시래기를 삶듯 찻잎을 푹 삶아 쓴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해서 그것을 마시고, 찻잎은 소금이나 버터를 발라서 먹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애써 우려 낸 즙(차액)은 버리고 잎만 소금이나 버터를 발라 먹었다고 하니, 아마도 차를 기호음료라기보다는 약으로 생각한 데서 연유한 기행(奇行)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이러한 풍습이 본국(영국)에서 전해온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홍차를 받침 접시에 따라서 마시다

 

본래 동양에서는 찻잔 밑을 받치는 접시(saucer)가 없었다. 받침 접시는 유럽의 창작물이다.

 

그런데 걸작인 것은 초창기 유럽인들이 차를 찾잔에 담아 마신 게 아니라 받침 접시에 차를 따라 놓고 고개를 숙여 혀로 핥듯이 먹었다는 것이다.

 

마치 견공(犬公)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마셨다하니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1701년 암스테르담에서 상영된 코미디극 중 〈티 파티에 초빙된 귀부인들>이라는 작품에는 차를 먹는 광경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티 파티에 초빙된 손님들이 오후 2~3시경에 찾아들면 여주인은 정중한 인사로 맞는다.

 

인사가 끝나면 손님들은 거실의 발 스토브에 발을 올리고 앉는다(여름에도 발 스토브를 사용하였음). 한편 여주인은 도자기나 은세공으로 만든 자그마한 다기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차를 내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차를 탈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나 차의 선택은 대체로 여주인에게 맡겨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하여 작은 찻잔에 주인이 선택한 차가 부어지게 되는데, 만일 손님 중에 차의 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인은 붉은빛 소형의 포트에 따로 사프린을 우려 두었다가 차가 조금 들어있는 큰 잔과 함께 손님에게 내놓는다.

 

그러면 손님은 사프린를 차에 타서 마셨다.

 

이때 쓴맛을 없애기 위해 설탕을 넣었는데, 초창기에는 밀크는 넣지 않았다.

 

그런데 걸작인 것은 차를 마시는 방법이다.

 

귀부인들은 차를 찻잔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고, 먼저 차를 찻잔에 받은 다음, 그것을 일부러 받침 접시에 부어 소리를 내면서 핥듯이 먹었다.

 

이렇게 차를 소리를 내면서 마시는 것은 값진 차를 내주신 주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요, 예의 바른 행위라 생각했던 것이다.

 

티 파티에서 나누는 화제는 차와 티 푸드 (차에 따른 음식)에 관한 얘기에 한하는 것이 관례였다. 참석자들은 대체로 10잔에서 심지어 20잔까지 마시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차 마시기가 끝나면 브랜디가 나오는데, 부인들은 브랜디를 마시면서 파이프로 담배를 피웠다.

 

다소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으나 아무튼 관객들은 이 코미디를 보면서 폭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코미디 작품 속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도 일부에선 남아 있었다고 한다.

 

커피 하우스는 여성 출입 금지 구역

 

초창기 커피 하우스에는 남성들만 출입이 가능했고, 여성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남성들도 입장료를 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들에게 나들이가 허용된 곳은 교회 정도였다.

 

그런 판국에 티 가든(tea garden)이 탄생하여 여성이 떳떳이 출입(외출)할 수 있는 광장이 마련되었으니, 여성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초기에는 남성동반이라야만 출입이 허용되었다가 이내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보면 차는 여성해방에 크게 한몫한 셈이다.

 

티 가든은 정원 안에 중국식 다실을 마련하여 중국 옷을 입은 웨이터로 하여금 서비스를 하게 하는 곳이었는데, 바로 이 티 가든에서 오늘날 영국 사람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티 파티(afternoon tea party)가 탄생하였다.

 

티 가든 가운데 대표적인 가든(樂園)은 복스홀 가든(Vauxhall Garden)과 라넬라 가든(Ranelagh Garden)이었다.

 

이들 가든은 1660년)찰스 2세(캐더린 왕비의 부군, 영국 역사상 제일가는 바람둥이)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고 평화가 회복되자 1732년에 문을 열었는데, 전자의 경우 정원의 넓이가 무려 48,000m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고, 울창한 수목 사이로 뚫린 산책로에는 1천 개도 넘는 가로등이 대낮처럼 주변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정원 안에는 연못은 물론 운하가 만들어져 있어 보트놀이를 할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또한 정원의 중앙에는 로턴다(Rotunda)라 불리는 원형 음악당이 있어 하이든이나 젊은 시절의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들의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 정원 안의 여기저기에 중국풍의 다옥이 있어 거기에선 성장한 귀부인들이 중국식 차림의 하인들의 시중 속에 차를 마시면서 음악을 즐겼던 것이다.

 

18세기 초까지 식사는 하루에 두 끼만 먹다

 

다음에는 차가 상류층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18세기 초, 영국 귀부인들의 생활의 단면을 《스팩테이터 (1712년 3월 11일 자)에 실린 한 귀부인의 일기를 통해서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수요일 아침 8시~10시, 침대 속에서 초콜릿 두 잔을 마시고, 다시 계속 잠을 잤다.

 

10~11시, 버터를 바른 빵 한 조각을 먹고 보헤아차(홍차)를 한 잔(adish of tea) 마신 뒤 스펙테이터지를 읽었다.

 

11~1시, 욕실에서 '베비 (하녀의 이름)를 시켜 세발한 다음 머리를 새롭게 단장하였다.

 

나에게는 청색 드레스가 가장 어울린다.

 

1~2시 반, 말을 타고 '체인지' (change)에 나가 값을 깎은 후 부채를 하나 샀다.

 

4시까지 저녁식사. 후로드 씨가 새 옷을 입고 지나갔다. 4~6시, 정장을 하고 노부인 부리스 여사와 그 누이를 방문하였으나 누이는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6~11시까지 바셋 (basset, 18세기에 유행한 트럼프 놀이의 일종)을 하고 놀았다. 앞으로는 절대로 다이아몬드의 에이스에는 걸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 일기를 통해 18세기 초, 영국상류층 부인들의 생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의 생활이 매우 나태했다는 사실과 함께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흥미로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 상류계급에선 오전 10시의 조반과 오후 4시의 저녁식사만 했고, 둘째, 매일 아침 조반에는 티를 마셨으며, 셋째, 차를 마시는 용기가 컵이 아니라 큰 접시(dish)였고, 넷째, 매일 아침 일찍 침대에서 마시는 음료가 차가 아니고 초콜릿이라는 사실 등이다.

 

영국에서 하루 식사를 3차례씩 먹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였다.

 

영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일과(日課)가 된 오후 5시경의 애프터눈 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 초 영국 상류사회의 식사시간을 보면, 호화로운 아침식사, 11시의 일레븐지즈(elevenses), 점심때는 피크닉풍의 가벼운 식사, 5시의 케이크가 곁들여진 애프터눈 티, 8시 저녁식사, 저녁 후에는 거실에서 다시 차를 마셨는데, 이러한 식사 패턴은 훗날 빅토리아 시대의 호화로운 식생활의 원형이 된다.

 

이러한 패턴이 중류사회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는데, 이때부터 애프터눈 티는 4시로 당겨졌다. 저녁식사가 늦어진 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직장과 주택이 분리되어 통근거리가 멀어진 점도 있지만 가스등이 발명되어 설거지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아침 일찍 침대에서 마시는 음료가 차가 아니라 초콜릿인 것은 차를 마시는 모닝 티의 관습이 정착된 때가 18세기 후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한 잔의 차'를 a cup of tea라 하지 않고, a dish of tea' 라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초까지도 차를 컵이 아닌 약간 깊이가 있는 접시에 마셨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앞서 얘기한 “차를 접시에 따라 혀로 핥듯이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근거 없는 루머만은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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