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톤 티 차 포장판매 역사의 시작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인 립톤 티.. 립톤 티는 최초로 포장지를 활용한 포장 차를 판매해 기존 광고 효과를 높임과 동시에 판매량을 늘려 파격적으로 차의 가격을 내렸다고 한다.
홍차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립튼의 이야기를 조금 더 알아보자
티 포장판매로 품질의 불만을 없애다.
기존의 저울 무게 방식의 판매방식은 두 가지 면에서 손님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하나는 과연 저울질이 정확한가 하는 중량에 대한 불신감이요,
다른 하나는 손님이 올 때마다 차 상자를 열게 되니 공기가 들어가 신선도가 떨어진 것이었다. 즉, 품질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런데 포장판매는 두 가지 단점을 동시에 해결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립튼은 포장지에다 차밭에서 차를 내는 원주민 아가씨들의 멋진 사진을 싣고 그 아래에는 다원에서 직접 티 포트로라는 그의 경영 슬로건을 새겨 넣음으로써 시각적으로도 립튼 차의 매력을 높였다.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자신의 다원에서 생산된 차만 가지고는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콜롬보, 캘커타, 런던 시장에서 차를 사모아 블렌딩 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 말 영국의 차 소비량의 증가세는 실로 파죽지세여서 불과 25년 만에 2배로 늘어난다. 이렇게 영국에서의 차 소비가 크게 증가한 것은 주민들의 소득향상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립튼의 파격적인 가격인하도 한몫했다. 그는 기회 있는 대로 립튼 티를 선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200명의 샌드위치 맨들에게 중국 옷을 입혀 거리를 누비게 하였고, 회사 안에 인쇄소를 차려놓고 20여 개국의 언어로 광고문과 포스터를 제작하여 세계 각국에 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고가 주효하여 차의 매상고가 격증해 립튼은 백만장자에서 일약 천만장자로 격상된다.
그 무렵 영국의 소득세는 5%에 불과했고 누 진세가 아니었기 때문에 날로 늘어나는 그의 수입은 미처 계산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차의 수입세 3만 5천 파운드를 단 한 장의 수표로 지불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글라스고에서 점포 두 개를 가지고 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특별한 취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만장자이면서도 사교계에는 별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수전노였던 것은 아니다. 옷차림은 항상 단정하고 타인에게는 겸손하며, 분위기에 따라 기분을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홍보의 대가 립톤
그러한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 든다. 1898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기념제(즉위 60년제)를 눈앞에 둔 어느 날, 《타임지》에 황태자비가 기념제 당일 가난한 방랑자나 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할 일을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으면 한다는 것과 함께 거기에 100파운드를 기증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이다.
그는 기회를 놓칠세라 즉시 당일의 급식에 필요한 차와 설탕 전부를 기증하겠다고 런던시장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의 기부행위는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부터 정중한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시장에게 모금 상황을 물어보았다. 총액 3만 파운드가 필요한데 겨우 그 6분의 1인 5천 파운드밖에 모이지 않아 매우 난감하다는 대답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PR의 찬스라 생각하고 즉석에서 2만 5천 파운드짜리 수표를 끊어 시장에게 건네면서 익명 으로 할 것을 당부했다. 갑자기 런던 시내가 소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만한 거액을 증하면서 익명을 요구한 자선가는 과연 누구일까? 가는 곳마다 화제였다. 이러한 소요(?)가 진정될 무렵,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허락했다.
립튼의 명성이 다시 한번 크게 올라간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립튼은 이렇게 완전한 찬스를 잡아 PR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당시 영국의 대부호 써 어네스트 캣슬이나 윌리암 W. 아스터와 동렬에 서게 된다.
립튼의 연수입은 1897년에 이르러 17만 5천 파운드로 뛰어 오른다. 10만 파운드 정도였던 그의 수입이 2만 5천 파운드를 기부함과 동시에 7만 파운드 이상 늘어난 것이다. 1897년 립튼은 차상(茶商)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이트 작위를 수여받아 '써' (sir)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서 1902년에는 준남작(Baronet)이 되어 명실공히 영국의 귀족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작위를 돈으로 샀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가 영국인들의 생활 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홍차 문화에 끼친 공로와 그 후 자신의 전재산을 글라스고 시에 기증함으로써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케 한 점 등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평은 정당한 것이 아닐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