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홍차 문화
- 아이스 티 · 티백 · 티 믹스
차 문화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차로 인해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일 뿐 아니라, 홍차의 문화사를 기술하는 경우 빼놓을 수 없는 세 가지 큰 발명품을 내놓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뉴욕을 최초로 탐험한 사람은 영국인 허드슨(Henry Hudson)이었다.
하지만 그는 네덜란드의 의뢰로 탐험에 나섰기 때문에 뉴욕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정확히 1626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이름을 자기네 수도 명칭을 따서 뉴암스테르담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도 잠깐, 38년 후(1664년) 영국이 그곳을 정복하고, 당시의 국왕 찰스 2세가 그곳을 동생 요크공에게 주면서 뉴욕(New York)으로 명명하였다.
처음 미 대륙에 차를 가져간 네덜란드 인
처음 미 대륙에 차를 가져간 사람은 네덜란드인들이었다.
물론 음다법도 네덜란드식이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미 대륙을 정복하면서부터는 차츰(1720년경부터) 영국식 끽다 법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는 처음부터 영국의 영향을 받아 질은 좋지 않았지만 우롱차나 보헤아(武夷茶)를 마시고 있었다.
1690년경에는 소수의 한정된 귀부인들 사이에 다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당시는 다구가 부족하여 다회에 초빙된 손님들은 자신의 다구는 물론, 스푼까지도 지참해야 했었다.
그 무렵 본국에서는 커피 하우스의 전성기가 끝나고 남성들을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가정의 차 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집 밖에는 차를 즐길 수 있는 티 가든이 새로 생겼다.
식민지 미국에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를 독점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에 차 값이 금값처럼 비싼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국의 유행에 뒤질세라 런던 근교에 티 가든이 새로 문을 열자마자, 그것을 금방 모방하여 뉴욕 교외에도 티 가든을 세웠다.
그 중 이름난 곳이 '워터 펌프 가든' (The Water Pump Garden)이었는데, 이 집 샘물은 질이 좋아 티 워터(Tea Water, 차 전용의 물)라는 상표로 판매되었다. 물을 파는 신종 장사가 이때 등장했던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7년 전쟁' 이 일어나자 미 식민지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게 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캐나다를 식민지로 삼게 되지만 전비를 너무 많이 지출하여 국고가 텅 비다시피 되었다.
조지 3세'는 왕권을 강화하여 “식민지의 방위비는 식민지에서 분담해야 한다"라고 결정하면서 관세의 징수를 엄하게 하는 한편, 지방세를 올렸다.
1767년 5월, 타운센드 법안(Townshend Acts)이 가결되어 마침내 차에 대한 과세가 결정되자, 미국인들은 영국 제품 보이콧 운동'을 펴는 한편, 일제히 검약 운동을 전개하고 모든 수입품에 대응해 국산 대체품을 만들어냈다.
수입 차 대신 라브라도르 티(캐나다 동부, Labradore 섬에서 산출되는 나무뿌리로 만든 대용차), 싸스프라스 티(sassfras tea, 미국산 규목 잎으로 만든 대용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대용차가 만들어진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영국의 대미 차 수출은 줄고 네덜란드로부터 차밀수가 성행하게 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 재고가 증가하는 것은당연했다.
마침내 1773년, 영국의회는 관세 없이 차를 미국으로 수출해도 좋다는 이른바 '차 조례'를 가결한다.
이리하여 차를 가득 실은 4척의선박이 대서양을 횡단하게 된 것이다.
다트 마스 호(114 상자), 에리나 호(114 상자), 비바 호(112 상자), 윌리암 호(58 상자)가 그 배들이었다.
영국 의회의 이러한 과세정책에 대해 밀수로 재미를 보고 있던 미국 상인들을 중심으로 항의집회가 열렸고 마침내 소동이 일어났다.
1773년 11월 16일, 어둠이 내릴 무렵, "배에 실린 차를 바다에 던져버리자!" 며일단의 사람들이 구리핀 부두로 몰려갔다.
이들은 다트마스 호를 비롯해서 차례로 영국 배에 올라가 차 상자를 파괴하고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재미있게 표현하기 위해 “오늘밤 보스턴 항에서는 티 파티가 열린다” “이름하여 조지 3세의 티 파티다”라고 외쳐댔다.
이것이 바로 '보스턴 다회사건' 이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미국 해역에서 영국으로 회유해오는 고기떼에서는 짙은 차 냄새가 난다는 익살 섞인 농담이 유행했다.
보스턴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소동이 일어나자 마침내 영국은 대대적인 보복에 나선다.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매사추세츠 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처는 미국 사람들의 반감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들은 혁명의 날'을 위해 무기를 준비했다.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에서 영 본국의 군대와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이 사건이 마침내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독립전쟁 종전 직후까지 "애국자는 누구도 차를 마시지 않는다"며 미국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 후, 미국 사람들은 중국과 차무역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미국 사람들 사이에 차가 주요. 한 기호품으로 정착되어 있었고, 차를 제외하면 중국에서 돌아오는 배를 채울 화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가 '증오해야 할 압제(座)의 심벌' 이기도 했지만, 이미 뿌리칠 수 없는 기호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 아래서 대용차보다도 더 가격이 싼 커피가 차츰 미국인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차 무역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더욱 번성한다.
한편 이 무렵, 미국에선 알코올 음료의알코올음료의 소비가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당연히 금주운동이 활발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1830년대에는 알코올음료의 소비가 급감하게 된다.
반대로 차 소비는 늘어, 1870~1897년 사이에 미국의 1인당 차 소비량은 전성기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훗날 '세계의 홍차왕' 이 된 T. J. 립튼이 1890년, 스리랑카에 대대적인 다원을 개척하여 녹차와 우롱차밖에 알지 못했던 건 미국에 다시 '영제 국 홍차'를 들여와 대성공을 거둔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미국에선 홍차보다도 커피를 더 마시고 있다.
공업화와 더불어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대부분 라틴계이기 때문이다(오늘날 미국의 1인당 차 소비량은 165잔으로서 캐나다보다 작지만 총량은 연평균 84,200여 톤으로 세계 제8위이다).
그러나 차 소비량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홍차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가지 발명품이 출현한다.
그 하나가 티백이고, 다음이 인스턴트 티 파우더(혹은 인스턴트 티 믹스), 마지막으로 흔히 우리가 아이스 티라 부르는 아이스트 티(iced tea)이다.
티백은 오늘날 세계 150여 개국에서 소비되고 있으며, 인스턴트 티믹스는 날로 그 질이 개량되어 앞으로 세계의 음다 습관을 일변시킬 가능성마저 보여주고 있다.
아이스 티는 20세기 초 무더위 속에서 개최된 센트 루이스 박람회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인도차생산자협회의 위탁을 받은 영국인 리처드 프래진댄은 정장에 터번을 쓴 인도인 스텝과 함께 '인도 차 (핫 티)의 보급을 위한 디몬스 트레이 션 쇼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어느 누구도 뜨거운 홍차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의 절망에 빠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유리컵에 얼음을 던지듯이 넣고 그 위에다 핫 티를 부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 호평을 얻어 아이스 티는 그 후 미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의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인들이 즐겨 마시는 여름 음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밀크 티는 영국 홍차, 레몬 티는 러시아 홍차의 대명사가 되었고 아이스 티는 미국 홍차의 대명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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