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 립톤
홍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홍차는? 이 글을 읽는 모두는 립톤을 떠올릴 것이다.
노란 포장지의 일회용 홍차. 립톤 티의 유래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도록 하자. 립톤 티는 립튼이라는 입지적인 인물에서 유래된 티이다.
홍차 하면 곧바로 립튼 티(Lipton Tea : Lipton's)를 연상하리 만큼 립튼은 우리의 귀에 익은 홍차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일본에 최초로 수입된 홍차가 바로 립튼 티요, 그 후 일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립튼 티가 소개된 데에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립튼 티는 비단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고 전 세계, 특히 미국에 더 잘 알려져 있어서 상당한 정도의 홍차 애호가 중에도 T. 립튼(Thomas Lipton, 1850-1931)을 미국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을 정도이다. 립튼 티의 창업자 토마스 립튼은 문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립튼
스코틀랜드의 상공업도시 글라스고(Glasgow)에서 자그마한 식료품상 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만년에는 나이트 준백작(Baronet)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어찌 입지전적 인물이라 하지 않겠는가! 립튼은 1850년 5월 15일 버터와 햄을 판매하는 작은 식료품상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본래 아일랜드계였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인 상재(商才)를 타고 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달걀을 팔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왜 어머니에게 달걀을 팔게 하지 않아요? 어머니 손은 작으니 어머니가 팔면 달걀이 더 크게 보일 터인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상재를 능히 짐작할 수 있, 지 않는가! 그는 또한 자립심이 매우 강한 아이였다.
열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간 그는 부모의 허락도 없이 동네 문방구점의 점원으로 취직해 거기에서 모은 돈으로 열다섯 살 때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행 이민선에 몸을 싣는다. 18달러의 배상을 지불하고 나니, 막상 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겨우 8달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배가 잔교에 닿자마자 그는 재빨리 뛰어내려 부둣가에 모여 있는 여관 안내원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아일랜드 억양의 사나이를 붙잡고 “내 친구들 열두 사람이 지금 배 안에 있는데, 만일 그들을 당신 여관으로 안내해주면, 내게 어떤 사례를 하겠느냐”라고 묻는다. "1주일 동안 무료로 먹고 재워주겠다”는 게 그 사나이의 대답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립튼은 배 안으로 다시 뛰어가 항해 중에 편지를 대필해주었거나 잔심부름 등을 해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여관 안내원에게 넘겨주었다.
덕택으로 1주일간이나 숙식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무렵 미국은 남북전쟁 직후라서 북부는 공장 문이 닫힌 채였고, 거리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로 붐볐고, 물가는 비쌌다. 반대로 남부는 노동력이 부족했다. 그는 처음 남부로 가서 이 일 저 일을 경험한 뒤, 3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와 백화점 식료 품부에 취직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여러 가지 장사를 배웠다. 그는 열심히 일한 덕택으로 승진도 빨라 그대로 나가면 틀림없이 번듯한 이민성 공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1869년 봄,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그의 짐은 어머니에게 선물할 안락의자 하나뿐이었지만 그의 주머니에는 500달러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잠시 아버지 일을 돕게 되는데, 그가 내놓은 최초의 아이디어는 미국식 광고법을 이용해서 손님을 모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짐마차를 한 대 구입하여 그 양편에 페인트로 크게 '립튼이다라 쓰고 거리를 달렸다. 지금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이 광고법이 당시로서는 몹시 생소하여 아버지는 당장 없애라며 마차를 돌려주고 말았다. 1871년 5월 15일 그가 21세 되던 해의 생일날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식료품점을 개업했다. 그는 미국에서 배운 대로 '장사 밑 은 오직 몸과 광고'라는 신념 아래 열심히 일한 결과, 개업 3년 후에는 몽매에도 바라던 지점을 내게 되었다.
성장세는 계속되어 개업 9년 후에는 지점 수가 무려 20개를 넘게 되었고, 뒤에는 체인스토어식의 직계점(直系店)이 매주 하나씩 늘어났다. 그에게는 아일랜드인의 피와 스코틀랜드인의 성격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가 평생토록 남과 공동사업을 싫어한 것이 아일랜드인의 피의 영향이라면, 타인과 금전대차를 싫어한 것은 스코틀랜드인의 성격 탓이었다.
이와 같이 어떻게 보면 보수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경영철학(?)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이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견실한 경영방침과 독특한 광고 방식 덕택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놀고, 낭비하는 일은 외면한 사람이었다. 이익이 나면 몽땅 재투자를 했고, 새로운 점포를 낼 때에는 반드시 이전 점포보다 상류계급이 사는 지역을 선정하여 점포를 환하고 멋있게 꾸며 나갔다. 거기에 거의 날마다 새로운 광고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의 광고방법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바로 '샌드위치 맨의 행렬'이다. 그는 신문광고를 적극 활용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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