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 립톤 2
한편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홍차는 영국인들의 생활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필수 음료가 되어 홍차 문화가 영국 사회의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어 바야흐로 생활 문화의 중심이 되어 갔다. 이와 같은 상황이니 차도 매상들이 세계 제일의 체인점을 자랑하는 립튼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체인점에서 차를 취급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러나 립튼은 차도매상들이 막대한 중간 마진을 부당하게 챙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그들의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차도 매상을 겸하기로 했다. 그때가 1889년이니, 그의 나이 39세 때로 벌써 영국에서 중견 실업인 지위를 굳힌 뒤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그와 차와의 만남은 비교적 늦었다. 그 무렵 스리랑카에서는 커피농원에 해충이 발생하여 커피농장이 거의 괴멸하게 된다. 그러한 커피 농원의 토지관리를 맡고 있던 런던의 한 은행원으로부터 립튼은 그 땅을 사서 차밭으로 재개발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1890년 여름 립튼은 호주출장 도중, 콜롬보에서 예비조사차 먼저 출발시킨 조사원을 만나 보고를 받는다. 그는 그곳에 여장을 푼 다음 기차로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투자할 만한 땅을 찾았다. 땅값이 너무 싼 데 내심 놀라면서 그는 서둘러 토지를 사들였다. 그는 3주간의 여행 중에 2,800ha의 토지를 입수했다.
그러나 토지대금은 그가 준비해간 돈(75,000파운드)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만큼 헐값으로 넓은 땅을 입수한 셈이었다. 립튼은 그렇게 해서 입수한 땅에 아삼종의 차나무를 심었다. 그는 다원에서 직접 티 포트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 사업, 즉 차의 재배에서 판매에 이르는 일관 경영을 시작한 것이다.
대대적인 광고전을 전개하였음은 더 말할 나 이와 같이 립튼이 실론에서 본격적으로 다원을 개발하자, 영국신문들은 '영국 무역사상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쾌거'라고 대서특필하게 된다. 립튼의 대대적인 다원 개발을 통하여 좋은 품질의 실론 티가 싸고 손쉽게 영국 가정에 직접 배달될 수 있게 되었으니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때까지 런던의 차상들은 서민들이 손쉽게 차를 살 수 있는 방안에 관해서는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당시 홍차는 1파운드(중량)를 단위로 판매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큰 상자에 홍차를 넣어두고 손님이 오면 저울로 달아 1파운드씩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값은 3실링이었다.
차 포장 판매 역사의 시작
주당 2파운드(40실링)의 소득밖에 없었던 서민들로서는 차를 손쉽게 살 수 없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서민들이 차를 손쉽게 사 마실 수 있는 방도가 없겠는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나온 결론이 판매단위를 대소(大小) 여러 가지로 나누어 그것들을 포장봉투에 넣어 판매하되, 중계상을 배제한다면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검토 결과 1파운드 당 1실링 7펜스, 즉 종전 값의 거의 반으로 내려도 손해가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동시에 판매단위를 1파운드(중량)짜리, 반 파운드짜리, 4분의 1파운드짜리로 나눠 포장에 담아 파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렇게 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차의 포장판매 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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