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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국 홍차의 탄생

by 부자 연아 아빠 202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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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에서는 차가 어떻게 영국에서 활성화 되었는제를 영제국 홍자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알아 보도록 하겠다.

영제국 홍차의 탄생

차를 좋아한 영국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중국차를 쉽게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인들이 수입하는 차는 기껏해야 질이 낮은 보헤아(bohea 부이 우롱차)와 덮음 녹차'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시 영국의 차 값은 같은 무게의 은과 맞먹을정도로 고가여서 차는 진귀하고도 귀중한 기호품이 아닐 수 없었다.

차가 왕실이나 일부 귀족들의 기호품으로 애용되면서 좋은 차를 싸게 구입하고자 하는 영국 사람들의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영국인들의 열망은 동인도회사가 중국으로부터 차를 대량 직수입하고, 또한 관세를 인하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성공에 따른 중산층의 형성과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은 차의 수요를 더욱더 빨리 증가함으로써 관세 인하도 값을 내리게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영토 안에서 차를 생산할 수 없을까 하는 궁리와 열망' 이 때마침 산업혁명으로 배양된 국력을 바탕으로 대두한 영제국주의(英帝國主義)와 함께 더욱 고조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제안이 바로 식민지 인도에서의 홍차의 개발 · 생산과 그 수입안 이었던 것이다.

이 제안이 처음 나온 것은 1788년경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아직 동인도회사의 독점이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또한 영국인들 중에는 한 사람도 차의 재배와 제조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1823년, 식물학자인 로버트 부루스 소령이 아삼 지방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였고, 그 10년 후에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이 끝나게 되자 중국 이외의 지역, 즉 인도에서의 차 생산의 필요성은 다시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34년 2월, 마침내 인도총독 산하에 차업위원회(茶業委員會)가 설치되어 차의 재배와 제조·가공에 관한 조사와 실험이 착수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 차의 종자나 묘목 그리고 노동자까지 데리고 와서 차 재배를 서두르기도 했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 1839년, 마침내 아삼 홍차(Assam Tea) 여덟 상자가 런던의 차경매장에서 성공리에 낙찰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의 기업가들이 대거 아삼지방에서의 차 재배에 참여하게 되었고, 마침내 민간회사인 아삼 컴퍼니가 설립되어 인도에서의 홍차 생산이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팍스 브리태니커를 개막한 빅토리아여왕이 즉위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삼 홍차를 영국 사람들은 '영제국홍차 (英帝國紅茶, The Empire Tea)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삼 지역에서의 홍차생산이 본격화되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의 차 생산업자는 규모가 영세하고 부업으로 경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다원도 대부분 산의 경사면이나 밭두둑이어서 정확 한 재배 면적마저 파악할 수 없는 처지였던데 반해, 아삼의 경우는 대동 영제국홍차의 탄생과 홍차 문화의 형성 경영방식의 티 플랜테이션이었다.

그 외에 중국의 차산업은 역사가 길긴 하지만 그만큼 차나무가 오래되어 생산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혼종(混種)이 많아 맛도 일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서 아삼의 티 플랜테이션에서는 당시의 선진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품질의 안정, 생산 코스트의 인하, 가공공정의 기계화를 통한 품질의 향상에 노력한 결과, 중국 홍차보다도 좋은 홍차를 더 싼값으로 공급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 인도차는 타닌이 많아 고지방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 유럽 사람들에게 더욱 잘 맞아 마침내 세계시장에서 중국 홍차를 축출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홍차하면 영국을 생각하게 되었고, 홍차가 중국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오해마저 생기게 되었다.

그 후 영국은 영제국(英帝國)의 각지, 즉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실론(스리랑카) 등으로 점차 재배지를 확장해 간다.

한편 네덜란드의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도 1870년대부터 본격적인 티 플랜테이션이 개발되어 오늘날에는 인도, 스리랑카, 케냐와 함께 세계 4대 홍차 생산국으로 손꼽히고 있다.

영국 홍차 문화의 형성과 특징

차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해갈이라는 생리적인 효능만을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을 애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문화를 형성케 한다. 이른바 차 문화' 이다.

유럽 사람들이 처음 동양의 차를 접했을 때에 차를 단순한 음료로서가 아니라 차를 위요한 문화, 곧 차의 문화에 매료되어 이른바 시노즈와리의 열풍이 일게 되었던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에 차가 들어오고 그것이 국민적 음료로서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영국인 특유의 홍차 문화가 점차 형성되기에 이른다. 영국에서 홍차 문화가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로서 정착하는 데는 2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차가 영국에 처음 전래된 것이 17세기의 중엽의 일이었는데 영국의 국민적 음료' 로서 정착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 기간이 빅토리아와 에드워드 왕조의 치세기(治世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영국의 홍차를 빅토리안 티 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빅토리안 티에는 매너나 에티켓 말고도 3가지 기본 룰이 있는데, 그것들은 후에 영국 홍차 문화의 특질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첫째 차는 바르게 우리고,

둘째 티 테이블 세팅은 우아하게 하며,

셋째 티 푸드(차에 따르는 음식)는 풍요로울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전통은 그 후 간소화되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

영국 홍차 문화의 정착 과정

이제 영국의 홍차 문화가 어떻게 정착되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에 차를 처음 가져다 준 사람이 네덜란드인들이었음은 이미 얘기한 바와 같거니와, 영국에 끽다 문화의 씨를 뿌린 사람은 포르투갈 출신의 왕비 캐더린(Catherine of Braganza)이었다.

그녀는 1660년 왕정복고(王政復古)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의 왕비인데, 시집올 때 지참금으로 홍차와 관련이 깊은 두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인도 뭄바이의 포르투갈 영토요. 다른 하나는 그가 타고 온 선박의 바라스(ballast: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하여 일부러 싣는 물건)로 신고 온 대량의 설탕이었다.

뭄바이의 포르투갈 영토는 후에 동인도회사가 인도제국을 건설할 때 전초기지가 되어, 훗날 영제국홍차(The Empire Tea)를 생산케 하는 발판이 되었으며, 설탕은 동양의 귀중한 차에다가 또 하나의 진귀품을 넣어 먹는다고 하는, 영국식 사치스러운 홍차 문화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 가운데 누구도 설탕을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30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설탕이 귀한 물건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다면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설탕얘기로 화두를 돌려보자.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인도이다.

이 수숫대에서 추출된 달콤한 꿀(설탕)이 유럽에 소개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아마도 고대의 설탕은 근세의 그것과는 달랐으리라 짐작된다.

아무튼 중세 유럽 사람들의 감미료는 벌꿀이 주를 이루었다.

스페인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후, 사탕수수는 카리브 해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스페인은 사탕수수의 재배보다.는 금·은과 같은 노다지의 채굴에 정신을 쏟았다.

그와는 달리 1500년영국에 차를 보급시킨 캐더린 왕비. 에 브라질을 식민지화한 포르투갈은 노예노동을 이용하여 사탕수수 재배에 착수, 1550년에는 벌써 5개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탄생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 확장해서 1623년에는 플랜테이션의 수가 물경 350개로 늘어난다.

사탕수수 재배가 유망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부에 침입하여 재배를 시도하지만 결국 쫓겨나고, 17세기의 후반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이 설탕의 공급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인도산은 값과 질 면에서 브라질산과 견줄 수가 없었다.

포르투갈에서 캐더린' 이 지참금 대신 설탕을 자랑스럽게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영국 홍차 문화의 형성과정을 살피는 것으로 옮겨가자. 당시는 귀족부인들이라 하더라도 차 도구의 입수가 쉽지 않았고, 설령 그것을 손에 넣어도 도구를 다룰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끽다의 보급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즈음 영국의 국내 정세는 명예혁명 이후, 오렌지공(公) 윌리암 33, 와 그의 처 메리 2세가 공동으로 군림하던 시기로 마그나카르타(大章典)가 발포되는 등, 새로운 기운이 감돌며 역사의 전기를 맞고 있었다.

여기에 1089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 복건성과 직접 무역을 개시하자, '중국 취미 (chinoiserie)가 영국 조야에서 일시에 고조되었다.

왕실은 물론 상류 가정에서도 고가의 중국 · 의흥산(宜興産) 다관이나 찻잔을 갖추어 가정부로 하여금 차를 시중들게 하는 게 하나의 스테이터스 심벌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는 차가 주된 음료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1707), 이른바 대영 연합왕국을 건설했다.

문학 분야에서도 황금시대' 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데포우(D, Detoe), 스위프트(I. Swift), 포프(A. Pope) 등, 쟁쟁한 대문호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새 시대를 연출한 앤 여왕(Anne, 1665~1714)은 이름난 미식가로서 아침식사에 반드시 차를 곁들임은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차를 마시고, 윈저성의 응접실에는 차실을 따로 마련하여 궁정 다회를 자주 열었다.

그녀의 남편도 커피 하우스 태번(Tavern, 선술집하고 여인숙을 겸한 곳)과 나중에 커피 하우스에서 발전한 클럽 같은 곳에서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약종상이나 커피 하우스에서 차를 천칭(天評)에 따라 조금씩 팔아 차가 상류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차는 왕실 전용의 음료였다.

영국에서 최초로 차가 시판된 곳은 1657년, 담배가게를 함께 운영한 게라웨이(GARAWAY)의 커피 하우스에서였다고 한다.

커피 하우스에서 차를 팔았다고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커피가 차보다 수년 앞서 영국에 들어와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도 커피와 같이 외래의 진귀한 음료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른 점이 없었기 때문에 한발 앞서 문을 연 커피 하우스에서 차를 메뉴 안에 넣어 파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다방에선 지금도 커피와 홍차는 물론 여러 가지 차류를 함께 팔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족을 붙이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당시 커피 하우스는 오늘날의 클럽 전신으로서 상인이나 귀족들의 사교장이요, 해외무역에 관계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정보교환 센터였다.

커피 하우스의 역할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신문 잡지 등의 저널리즘, 문필로 생계를 꾸리는 문인들이 애용하면서 문단이 탄생했고, 훗날 영국의 과학을 주도한 왕립과학원(王立科學院)도 바로 이 커피 하우스에서 탄생하였으니, 커피 하영국에서 홍차를 최초로 판매하기 시작한 커피하우스 '게라웨이스', 이 건물은 런던 대화재 후 신축한 것임. 커피 하우스야 말로 영국의 지적 생산력의 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입장료 1펜스를 지불한 뒤 들어가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하게 되는데, 커피 값은 한잔에 2펜스였다.

처음에는 남성들만 입장이 허락되었고, 여성은 남자와 동반하는 경우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커피 하우스가 영국에서 처음 문을 연 것은 1650년 옥스포드에서라고 하는데, 17세기 후반~18세기 초가 전성기였다.

1683년 런던에는 약 3천 개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고 있었다고 하니, 그 성세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모든 커피 하우스가 차를 팔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차로 유명한 곳은 게라웨이였다.

게라웨이는 '시티의 롬바드 가(街)와 콘힐 가(街)가 맞물린 뒷골목, 오늘날의 버클리은행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파는 차는 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험이 크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져 늘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 집 주인이 1660년 최초로 차에 관한 광고를 냄으로써 유명해지기도 했다.

광고에 언급된 차의 효능으로서 “차가 정력 증진에 좋다"는 점을 맨 앞에 들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차는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초창기 영국 사람들이 마신 차는 어떤 차였을까. 왕족이나 귀족의 취향은 중국산 녹차였고, 일반 사람들이 이따금 집에서 우려 마시는 것은 무이(武夷)의 하급 우롱차였다.

여기에 18세기 전반에는 값싼 가루녹차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차 무역 독점이 궤도에 오름에 따라 차의 수입이 많아지면서 귀족· 상류층에서는 여왕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는 게 유행되어 은으로 만든 차도구 세트를 갖추어 차를 즐기는 것이 마치 스테이터스 심벌인 양 생각하여 그 마련에 다투어 열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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