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레이스 차보다 더 열광하는 배송 전쟁 2
1847년, 영국 최초의 클리퍼인 섬들의 지배자' (Lord of Isles)가 만들어진다. 이어서 다음 해에는 스코틀랜드 조선소(알렉산더 홀)에서 두 척의 쾌속 범선이 건조되었다. 이름하여 레인 디아 호와 월터 핏트 호였다. 이들은 초기 클리퍼 시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특히 레인 디아 호는 185)년 광동을 출범한 지 110일 만에 런던에 도착함으로써 '새 차를 연내에 싣고 온 최초의 선박'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미국 오리엔탈 호의 등장
그러나 좀더 빨리 새 차의 향기를 즐기고자 하는 차 애호가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영국 차 무역에서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1848년 항해조례가 폐지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1850년 12월 3일 미국에서 건조된 클리퍼 오리엔탈 호가 그 해에 채취한 이번 차(二番茶)를 신고 97일 만에 런던의 서인도 독에 입항한 것이다.
오리엔탈 호는 스마트한 선체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뱃머리(船首), 흐르는 듯한 선미(船尾), 동인도회사 소속의 범선들보다 두 배나 넓은 돛(帆)을 달고 대포는 물론 모든 무기를 버려 선적능력을 대폭 늘인 획기적인 쾌속선이었다. 이 배가 불과 97일 만에 신차를 싣고 위풍도 당당하게 입항하였으니, 모든 면에서 최고라 자부하던 영국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함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국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오리엔탈 호의 날씬한 선체뿐만이 아니었다. 이 배는 1,500톤의 차를 톤당 6파운드의 운임을 받아 일 항차(航次)에 물경 9,000파운드의 운임을 벌게 된 것이다. 이 배의 총 건조비 가 14,000파운드였다고 하니, 단 한 자례(편도) 항해로 건조비의 3분의 2를 건진 셈이다. 더욱이 톤당 6파운드라는 운임은 지금까지의 자유 무역선보다도 2파운드(종래는 8파운드였으니 25%), 합계 3,000) 파운드나 싼 것이다.
거기에 전대미문의 햇차는 프리미엄까지 붙어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갔으니 차상들은 예상치 못한 큰 이익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것은 차상들만이 아니었다.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소비자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햇차의 신선한 향기에 놀랬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싼 값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충격은 영국 선주들로 하여금 미국 쾌속선에 대항할 수 있는 클리퍼의 건조에 힘을 쏟게 한다.
이리하여 1850년에는 홀 조선소에서 스트로웨이(Stronoway)호, 다음 해에는 크라이 솔리트(Crysolite)호, 1852년에는 챌린저(Challenger)호가 각각 건조되는 것이다. 《범선 사화(帆船史話)》에 의하면 1850년대 클리퍼의 수는 미국이 많았으나 질적으로는 영미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라고 전하고 있다.
티 클리프 레이스의 시작
그만큼 단시간 내에 영국 쾌속선의 질이 향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누가 먼저 새 차를 싣고 오느냐?' 하는 '티 클리퍼 레이스' 가 시작된 것이다. 런던 사람들은 영미 대항 레이스가 된 티 클리퍼 레이스에 점차 열을 올림과 동시에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신선한 향기와 맛이 가득한 새 차를 초조히 기다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여성 중심이던 티 타임에 남성들도 자진해서 참가하게 됨으로써 한때 정체상태에 빠져 있던 차의 소비량이 일시에 급증하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1810년 0.4kg에 지나지 않던 1인당 홍차의 소비량은 1860년에는 1.3kg, 1880년에는 2.2g으로 격증됨으로써, 이른바 빅토리아 여왕 시대 홍차 붐의 바탕이 마련된다.
이러한 붐을 예상한 런던의 차상들은 1856년, “누구든 신차를 제일 먼저 실어오는 클리퍼에 대해서는 톤당 6펜스의 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발표가 나자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 홍차애호가는 물론 선주나 저널리스트, 수송업자, 심지어 시골 농민들까지도 모두 여기에 빠져드니 티 클리퍼 레이스는 문자 그대로 영국의 국민적 행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오늘날의 경마 팬들처럼 저마다 좋아하는 클리퍼에 돈을 걸고 클리퍼가 영불해협에 접어들어 해안가의 산봉우리에서 볼 수 있게 되면 망꾼들이 때마침 가설된 전보를 통해 전해주는 중간성적에 일희일비하면서 남자들은 일손을 놓고 클리퍼들의 마지막 스퍼트를 보면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가장 흥분한 경기는 1866년 5월, 에리에르 호(공기의 요정, 853톤 1864년 진수)와 다에핀 호(泰平, 1863년 진수), 그리고 세리카 호(비단의 뜻, 1864년 진수)를 비롯한 11척의 쾌속 범선들이 벌인 경주였다. 우승후보는 단연 앞의 세척이었다. 레이스의 승자는 배가 런던 항의 독에 닿아 차의 샘플을 내리는 시각으로 결정되는데, 이들 세 척은 중국을 출발한 지 91일 만에 아조레스 도(島)를 통과하였고, 영불해협은 에리에르호와 다에핀 호가 나란히 통과했다.
99일째는 에리에르 호가 다에핀 호를 많이 앞지르는 듯하였으나 템즈 강에 들어선 후 그만 후자가 앞질러 20분 앞서 독에 골인하게 되었다. 다에핀 호가 역전하게 된 것은 첫째로 우수한 예인선과 안내원을 고용하여 최단 항로를 택했고, 둘째로 때마침 썰물을 만나 수심이 줄었기 때문에 흘수(吃水)가 얕은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에리에르 호는 실제로 선체도 컸고 차를 많이 실어 150톤이나 더 무거웠었다. 결국 에리에르 호는 약간 늦었지만 차를 많이 실어 왔다는 공을 인정받아 승부는 공동우승으로 낙각 되었다. 상금을 두 선장이 나누어 받았다.
클리퍼가 강한 서남풍의 뒷바람을 받으면 속도가 물경 14~16노트(오늘날의 일반객선의 속도) 일 정도로 고속이었기 때문에 선장이 어떻게 이 강한 뒷바람을 잘 받느냐(이걸 범선원들은 환장질'이라 한다)에 승패가 가름되는 것이다. 선장의 솜씨야말로 기수(騎手)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시즌이 끝나면 팬들은 내년에는 무슨 배가 신조된다더라, 아무개 선장은 어느 배로 이동한다더라 하면서 화제를 이어갔다.
마치 오늘날의 프로야구팬들처럼. 1860년대 내내 클리퍼가 계속 건조되어 부둣가가 배 마스트로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시인 C.F. 스미스는 마스트는 숲처럼 / 배이름은 흡사 시가와 같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배 이름이 시가(詩歌)처럼 환상적이다 보니, 자연 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랑을 받게 되었고, 이래저래 홍차 애호가들의 로망은 날로 커가게 되었다. 클리퍼의 이름은 대체로 자연이나 옛 신화나 전설 속의 주인공의 이름을 본뜬 것들이 많다.
옛 전설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것 중에서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커티 샤크(Cutty Sark)이다. 커티 샤크란 짧은 내의, 곧 슈미즈를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내의를 뜻하는 커티 샤크가 쾌속범선의 선명으로 붙여진 것일까? 그것은 내의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영국의 민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즉 린 넬로 짠 엷은 슈미즈만을 걸친 여주인공 나니'의 형상을 선수에 새겨 놓은 데에서 연유했다.
아무튼 1809년 11월 22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지 6일 후에 진수한커티 샤크는 모든 면에서 클리퍼의 왕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커티 샤크 호는 시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티 로드가 5천 마일이나 단축되었지만 운하는 오직 기선만 통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커티 샤크는 티 클리퍼로서 한 번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양모를 싣고 다니는 울 클리퍼로서 호주항로를 오고 가다가 1895년, 마침내 포루투갈인에게 팔려가 이름(처음에는 페래이다. 후엔 마리아 드 안빠로) 마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비운의 선박이 되었다.
다행이 그 배에 너무나도 매료되어 있던 드만이라는 영국인 선장 내외의 피나는 노력으로 만년(?)에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본명을 되찾게 되었지만, 드만 선장이 죽자, 그의 부인에 의해서 1936년, 템즈 항해학교에 수리비까지 얹어 기증되었고, 1949년에는 그리니치(Greenwich) 국립 해사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오늘날에는 그리니치의 부듯가에 전시 · 보존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시운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이 경우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인을 포함하여 세인의 뇌리에서 티 클리퍼 커티 샤크 이름이 사라진 지는 오래 되었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양주족들은 위스키 커티 샤크를 오늘도 즐겨 마시고 있다. 비록 애주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바람을 가득 받고 달려가는 커티 샤크 라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어떻게 선박의 이름이던 커티 샤크가 위스키의 이름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클리퍼 커티 샤크가 거의 그 생명을 다해갈 무렵, 새로운 위스키를 개발·시판하려던 런던의 양주 업자가 있었다. 바로 베리 형제였다. 그들이 옛날 티 클리퍼 레이스를 좋아했던 올드 팬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자신들의 새 위스키 이름에 왕년의 스타 커티 샤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티 샤크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으니 베리 형제의 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1850년대부터 20여 년간 영국민을 열광케 했던 티 클리퍼 레이스도 기선의 발전과 더불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하여 신선한 새 차를 싸고 빠르게 라는 영국인들의 열망은 클리퍼가 아닌 기선에 의해서 실현되었는데 그때가 19세기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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