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의 등급과 품질
지금껏 맛있는 홍차의 선별법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맛있는 홍차를 제대로 우려내고자 한다면 홍차의 등급과 품질에 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홍차를 즐기는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고, 역사도 깊지 않아서 홍차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우 백화점 식품코너 구석에 한두 가지 회사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게 고작이다.
그만큼 선택의 폭이 좁다는 얘기다.
아무튼 거기에 진열된 홍차 제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와인의 라벨처럼 설명문이 사면을 가득 메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맨 위에 대체로 상호(商號) 및 상표가 표시되어 있다.
예컨대, 선택한 홍차에 FORTNUM &MASON Established 1707이라 쓰여 있다면,
1707년에 설립된 포트넘 앤드 매이슨사(社)에서 블렌딩 한 홍차라는 뜻이다.
다음에는 상품명과 등급(grade)이 표시되어 있다. 예컨대 Netweight 125g 4.4oz라는 표시는 125g의 무게, 온스로는 4.4온스란 뜻이다.
홍차의 등급
일반적으로 우리는 차의 등급을 상, 중, 하 또는 1, 2, 3등급으로 나눈다.
상등급이나 1등급일수록 질이 좋은 고급품을 의미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홍차의 경우는 달라서 등급이 곧바로 품질의 좋고 나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홍차의 등급은 A, B로 표시하거나 더욱 1등, 2등으로 표시하지 않고 BOP, FOP 등 우리에게 낯선 용어를 사용한다.
이 표시는 찻잎의 부위(혹은 형상)와 크기를 나타내는 기호(記號)이다.
따라서 그 표시가 바로 맛의 좋고 그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복잡하게 등급(tea grading)을 나눌까?
일반적으로 다원에서 채취해 온 찻잎을 소정의 절차에 따라 제다공정을 모두 마치고 건조까지 끝내면, 그것을 황차(荒茶)라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사용(음용)할 수는 있지만, 그 상태로는 상품으로서 거래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복잡한 제다공정을 거치는 사이에 큰 잎, 작은 잎 등 여러 가지 크기의 차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별의 과정이 필요하고 찻잎의 크기에 다라 홍차의 등급 구분(tea grading)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차는 잎 크기에 따라 우려내는 시간이 달라진다.
잘게 자른 찻잎일수록 단시간에 추출되고 잎이 클수록 시간이 길어진다.
만일 하나의 차통(봉지) 안에 형상이나 크기가 서로 다른 찻잎을 함께 넣는다면, 어떤 잎은 너무 진하게 우려 져 맛이 떫어지고, 어떤 잎은 추출 시간이 너무 짧아 제대로 빛깔과 향이 우러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차의 생명인 맛이 엉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차통(봉지)안에는 절대로 서로 다른 형상의 차(잎)를 섞지 않는 게 홍차 제조의 기본 룰이다.
찻잎(leaf)은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맨 위쪽에 갓 돋아 난 새순(雀舌)을 플라워리 오렌지 페코(Flowery Orange Pekoe :FOP), 그 아래에 자리한 두 번째 잎을 오렌지 페코(Orange Pekoe : OP), 그다음을 '페코 (Pekoe : P), 네 번째 잎을 페코 수송(Pekoe Souchong : PS), 그리고 마지막으로 넓고 굳어진 잎을 수숑(Souchong :S)이라 한다.
홍차의 등급은 잎을 자르는 정도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눈다.
잎을 자르거나 분쇄하지 않은 상태를 홀 리프(whole leaf), 가늘게 자른 상태는 브로큰(broken), 브로큰보다도 미세하게 자르거나 가루로 만든 것은 판닝스 앤드 더스트(fannings and dust)라고 한다.
홍차의 등급은 잎의 종류를 각각 다르게 가공하다보니 자연 많다. 여기에서는 OP, BOP. BOPE. D를 자세히 살펴보겠다.
OP (Orange Pekoe) 오렌지 페코(OP)는 일반적으로 위에서 두 번째 잎을 주원료로 한 것으로, 길이가 7~12㎜ 정도의 바늘 모양인데 엷은 새싹의 칩(tippy)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차의 빛깔은 등색으로 연하다. '오렌지 페코라 해서 오렌지 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길이가 7~12m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기준일 뿐, 나라와 산지, 심지어는 같은 지역 안에서도 제다공장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본래 페코(pekoe)란 백호(白毫, 파이하우)에서 연유한 것으로 차의 원산지인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북부에서 백호종(喬木性) 차나무의 윗부분에서 싹튼 호아(毫芽, 약 3cm)로 만든 녹차 중 '대백호' 를 지칭한 말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은침백호(銀針白毫, 인첸파이하우)를 들 수 있는데 얼핏 보기에 하얀 털에 감싸인 듯한 진품(珍品)과 명차(名茶)는 중국의 수출 전용품으로 네덜란드의 상인들에 의해 영국에 전해져, 영국 왕실에서도 귀중한 선물로 사용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명가를 짐작할 만하다.
은빛으로 빛나는 잔털이 돋아난 페코는 향기가 맑고 신선하며 맛은 한량없이 부드럽고, 빛깔은 약간 연한 오렌지 빛을 띠고 있다.
백호는 파크하오, 파크호 등 여러 가지로 발음되나, 그것을 주로 수출하던 복건성의 아모이의 방언으론 페호(pe ho)라 발음한다.
그걸 영국 사람들이 페코 로 잘못 들어 영어로 pekoe' 라 적으면서 페코가 오늘날에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한편 오렌지 페코는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홍차 생산이 궤도에 오르게 되자, 영국인들이 중국산 백차(白茶)와는 대조적으로 충분히 산화 발효해 차의 빛깔이 선명한 오렌지 빛을 띠는 찻잎(브로큰 하지 않는 홀 리프 스타일의 홍차)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오렌지 페코라 불렀다. 한자로는 운黃白毫' 라 표기한다.
19세기 말까지는 아직 홍차의 품질을 맛이나 향보다도 찻잎의 외관이나 형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던 시절이라서 OP는 당연히 차(잎)의 상급품'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20세기에 들어와 차는 보는 것' 으로부터 마셔본 뒤 '맛과 향에 의해서 품질을 결정하는 것'으로 그 기준이 바꿔질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오늘날은 OP라고 해서 반드시 상등품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BOP (Broken Orange Pekoe) 차의 원료인 생엽은 원래 일심이엽(一志二葉)이나, 일심삼엽(一志二葉) 즉 부드러운 잎만을 채취하여, 위조(姜周 withering)한 연후, 유념(柔 rolling)해서 발효(fermentation)시킨다.
그런데 이 유념기계의 설계 여하에 따라 정통적인 제법이라 하더라도 찻잎의 형상과 크기가 달라지게 된다.
유념기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통일(wholeleaf) 형의 OP를 만들기 위한 '리프 스타일 롤러', 브로큰형의 BOP와 BOPF 등을 만들기 위한 '브로큰 스타일 롤러 가 그것이다. 전자는 서서히 비비면서 잎을 말아 가는데 반해, 후자는 위에서 강하게 압력을 가해 누른 채 유념을 하는데, 중앙의 콘(corn)에서 주변으로 뻗쳐 있는 복수의 융기한 돌기 부분(hill)에 의해 찻잎을 절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원료의 생엽은 같다고 하더라도 유념방식의 차이에 따라 제품이 OP와 BOP 및 BOPF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BOP는 본래 OP 형의 차로 만들 수 있는 찻잎을 기계로 파쇄한 것으로 사이즈는 보통 2~3mm㎜ 정도이나, OP의 경우처럼 나라에 따라 그 크기가 반드시 일률적이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차의 빛깔은 진하고 향미(flavor)도 뚜렷하다. BOPF (Broken Orange Pekoe Fannings) BOPF는 BOP보다도 더 잘게 자른 것으로 크기가 보통 1~2㎜ 정도이다.
차의 빛깔은 짙고 향미도 재빨리 추출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고급 티백에 많이 사용된다.
한편 BOPF보다도 약간 큰 PF(Pekoe Fannings). 약간 작은 F(Finnings)도 있다. 이것들은 품질이 BOPF 보다 약간 떨어지며 주로 티백에 사용된다.
D (Dust) 더스트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먼지' 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홍차 업계의 용어로선 제다공장에서 만들어진 찻잎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의 분차(茶)'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사전적인 해석에 충실한 나머지 차 부스러기'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차(dust)라고 품질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중 상품은 아주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반면 하급품은 인도나 스리랑카 등 생산국 사람들의 일상용 차(우리의 보리차)로 대량 소비되고 있다.
차의 빛깔은 진하고 맛도 강하며 빨리 우러나 중량에 비해차를 많이 추출할 수 있으므로 경제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홍차의 품질
FTGFOP (Fine Tippy Golden Flowery Orange Pekoe)
요즘 소비자의 취향이 고급화되면서 일부 다원홍차(Garden Tea)에서는 좋은 차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많은 수식어를 붙여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FTGFOP 가 그 예라할 것인데, 굳이 번역하면 좋은(훌륭한) 금빛 싹이 많이 포함된 꽃 향기 짙은 오렌지 페코라는 뜻이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하여 앞에서 인용한 DARJEELING-Broken LE0 Orange Pekoe Extra'라는 라벨을 풀이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다즐링 지방에서 재배된 차나무의 두 번째 잎(BOP)을 잘라 제조한 홍차로서 통잎(whole leaf)으로 만든
OP(Orange Pekoe) 보다는 약간 짧은 시간에 우러나는 고급차' 라는 뜻이다.
'고급품'이라는 뜻은 끝머리의 Extral' 가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일반 등급의 차에는 그런 표시가 없다.
다즐링은 홍차족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세계 3대 명차 산지의 한 곳이다.
그곳에서 재배된 두 번째 부드러운 찻잎으로 만들었으니까 비록 FOP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아직 활짝 펴나지 않는 부드러운 새순만을 정성을 들여 알맞게 잘라 만든 상품이라는 뜻이다.
찻잎을 자르거나 분쇄하지 않는 통 잎(whole leaf)으로 만든 차와 자르거나(broken), 분쇄한(funnings and dust) 홍차(분급차) 중 어느 것이 더 맛이 좋을까?
이 물음은 홍차족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보는 기본적인 의문이라 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19세기까지는 통잎 쪽을 더 치는 경향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후자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요즘 우리들이 시장에서 사다 마시는 홍차의 태반은 맛의 안정과 균질화를 위해 여러 가지 찻잎을 배합한 '블렌딩 티' 다.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생활에서는 추출 시간이 긴 통잎보다도 빨리 우러나는 브로큰(분급차) 쪽을 더 선호하게 된 데에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다만 차의 맛, 특히 기호품의 맛이란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어떤 차가 좋은 지에 대한 판정은 애호가 각자의 기호에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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