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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의 확산과 보급 과정

by 부자 연아 아빠 202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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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서 설명한대로 홍차는 중국에서 발생하여 주변국으로 점차 확산이 되었고 유럽으로 건너가 홍차 고유의 문화와 함께 더둑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상에서 설명한 홍차의 확산 · 보급과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홍차의 확산과 보급 과정

16세기 이전: 중국 시대 차의 발생 · 주변국으로 확산 16세기: 포르투갈 시대 유럽에 차의 정보 발신

17세기: 네덜란드 시대 차의 유럽 전래

18세기: 영국 시대 차의 유럽 정착,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홍차의 탄생

홍차의 확산과 보급 과정 등에 대하여 이해를 하였으면 이제는 본격적인 홍차의 탄생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중국은 차의 발원지이다. 홍차도 물론 중국에서 처음 탄생했다. 다만 영국에 들어가 영국의 문화와 결합하여 꽃을 피웠을 뿐이다.

 

오늘날 홍차라 하면 영국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홍차가 생산(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속설을 믿고 있는 사람들마저 없지 않은 형편이다.

 

"옛날에 중국에서 유럽까지 녹차를 배로 운반하는 도중, 적도를 지나면서 선창(船倉)에 쌓아 둔 찻잎이 고온과 습기 때문에 발효하여 색이 검게 변했다.

 

배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이 발효된 차를 마셔본 사람들은 맛이 좋아 크게 기뻐하였다. 이것이 홍차의 기원이다 ."참으로 그럴듯한 얘기이지만, 이는 잘못된 속설에 불과하다.

차가 유럽으로 수송되기 시작한 17-18세기 무렵의 중국 녹차는 이미 명대(明代, 16세기 초)의 발전기를 거친 뒤여서 산화효소의 활성이 열로 완전히 살청(殺靑)되어 있는 덖음차'였다.

 

다시 말해서 인도양의 항해 정도로 변질될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중국에서는 각종 차가 개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홍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복건성의 일건식(日乾式) 무이차(武夷茶)가 이미 제조되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 반발효차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0세기경이라 전하나 그에 관한 확실한 사료는 없고, 발효차인 홍차를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1610년 복건성 숭안현 성촌진(福建省 崇安縣 星村鎭)에서의 일이라 한다(《설록》 1996년 1~2월호 21쪽).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녹차)가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때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일이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종합해볼 때 녹차가 선창 안에서 발효되어 홍차로 변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는 속설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만 그 무렵까지는 아직 발효차의 중국내 소비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따라서 그 생산량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18세기 초까지도 영국으로 수출되는 발효차 보헤아 (Bohea, 武夷茶)의 양은 별로 많지 않았다.

1702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주문서를 분석해보면, 하급 녹차인 송라산(松羅山)이 3분의 2, 고급 녹차인 대주(大珠, 임페리얼)가 6분의 1, 나머지 6분의 1이 보헤아(武夷茶)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때까지도 영국 사람들 역시 녹차를 주로 마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발효차로 기호를 바꾼 속도는 매우 빨라서 1720년대의 후반에는 수입차의 45%가 홍차, 30년 뒤인 1750년대 말~1760년대 초에는 66%로 증가하였고, 18세기의 중엽부터는 홍차가 주종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발효차의 수요가 급증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영국에서 차의 소비가 급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입권은 여전히 동인도회사가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밀수입이 성행하는 것은 물론, 수입차에 불순물을 섞어 파는 악덕상인마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녹차는 불순물을 섞어도 그 판별이 어려운 반면, 발효차는 쉽게 판별할 수 있었다.

 

홍차가 유행하게 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하나는 육식을 주로 하는 영국 사람들의 식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발효차는 지방이나 단백질의 소화를 촉진하여 식후에 발효차(홍차)를 마시게 되면 입안의 지방질을 깨끗이 씻어준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된 영국인들이 차츰 녹차로부터 발효차로 기호를 바꿔가게 된 것이다.

 

한편, 중국 쪽에서도 이와 같은 영국의 수요변화에 부응하여 발효차의 생산을 늘리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예컨대, 안휘성 서남부의 기문현(神門縣, 안휘성의 서남부, 강서성과의 경계에 위치한다)에서는 당(唐)대부터 차를 생산해 왔으나 모두 녹차였다.

 

그런데 1784년에 복건성의 관리였던 여 간신(干臣)이라는 사람이 복건성의 공구차(工夫茶, 중국어 공후' 가 서양사람들에 의해서 '공구' 라 변음 되었음. 工夫紅茶란 손질 또는 기술을 많이 들인 홍차라는 뜻으로, 특별히 손질하여 그 형상, 색깔, 광택, 향미의 생성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차임)가 이익이 크다. 는 사실을 알고 현재의 동지현(東至縣)에 공장을 세워 공구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큰 이익을 얻은 그는 다음해에 키먼(郁門)에 두 개의 제다공장을 설립하여 키먼 홍차(不門紅茶)를 생산한 후, 차츰 그 규모를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저 유명한 세계 3대 홍차의 하나인 키먼 홍차(keemun tea)의 기원이다.

 

그런데 키먼홍차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호원룡(元龍)이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호(胡)씨는 키먼(門)의 남부 귀계(貴溪) 출신으로 1786년에 일순제다공장(日順製茶工場)을 개설하여, 우롱차를 개량해서 키먼 홍차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어느 설이 옳든 간에, 키먼 일대는 자연조건이 발효차 생산에 아주 적합하여 제조된 공구홍차에는 천연의 향기가 절로 배이게 된다고 한다.

 

또한 제다법도 지금까지의 일건식에서 배제법(陰製法, 대고닥 안에서 발효시킨 찻잎을 가마에 넣고 밑에서 열을 가하여 건조시키는 법)으로 발전하여 품질이 크게 향상됨으로써 순식간에 국내외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중국에서는 홍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우롱차를 차츰 진화시킴으로써 마침내 홍차를 탄생시킨 것이다.

한편, 중국 홍차의 다른 하나인 랍선 스죵(Lapsun Suchong 正山小種)은 복건성의 무이암차武夷岩茶)를 진화시킨 특수한 홍차인데, 일부러 솔잎을 태워 그 훈연(盧煙)을 찻잎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독특한 향미를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이 '스종'은 1870년대, 한때나마 유럽시장을 석권한 적이 있었으며, 지금도 영국의 상류 지향족(上流指向族)들이 애써 즐겨 마시는 차이기도 하다.

 

이밖에 운남성이나 광동성 등지에서도 공구 홍차'를 만들어냄으로써, 중국은 녹차는 물론 홍차에 있어서도 그 탄생 국으로서의 영예와 지위를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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